배리 매닐로는 왜 60년이 넘는 활동 뒤에도 여전히 의외의 면모와 미스터리를 함께 남기는 가수로 보일까

배리 매닐로는 오랫동안 미국 대중음악의 매우 익숙한 이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덜 알려진 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를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아 부드럽고 감상적인 멜로디를 들려주는 스타로 기억하고, “I Write the Songs”나 “Copacabana” 같은 곡과 함께 쉽게 떠올린다. 그러나 정작 그의 삶과 경력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대중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미지 뒤에 훨씬 더 복잡하고 의외의 층위가 숨어 있다는 사실이 보인다. 그는 처음부터 무대 위 스타가 되고 싶어 했던 사람이 아니었고, 광고 음악과 편곡, 반주와 뮤지컬 작업을 통해 훨씬 뒤에서 음악을 만들고 싶어 했던 인물에 더 가까웠다. 또 오랫동안 사생활을 거의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아왔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오랜 관계를 공개하며 삶의 중요한 부분을 다시 설명해야 했다. 그래서 배리 매닐로의 이야기는 단순한 팝스타의 히트곡 연대기보다는, “나는 원래 어떤 음악가가 되고 싶었고, 세상은 나를 어떤 스타로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을 오래 품고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처럼 읽힌다.

먼저 인물 소개부터 간단히 할 필요가 있다. 배리 매닐로는 뉴욕 브루클린 출신의 미국 음악가로, 싱어송라이터이자 편곡자, 피아니스트, 프로듀서, 공연자로 활동해 왔다. 그의 이름부터가 이미 가족사의 흔적을 품고 있다. 친부의 성은 켈러허였지만, 출생신고서에는 먼 친척의 성인 매닐로가 쓰였고, 결국 그는 외가 쪽 성을 사용하게 된다. 이런 배경은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한 인물의 정체성이 처음부터 완전히 단순하지 않았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또 그는 지금은 피아노 연주와 함께 기억되지만, 실제 첫 악기는 아코디언이었다. 유대계와 이탈리아계 뉴욕 아이들 사이에서 음악 재능이 보이면 흔히 아코디언을 배우던 문화적 환경 속에서 시작했는데, 그는 그 악기를 싫어하면서도 나중에는 그 경험이 음악의 문을 열어 주었다고 회상한다. 결국 피아노를 접한 뒤에야 음악이야말로 브루클린을 벗어나는 길이자 평생의 열정이 될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배리 매닐로의 시작은 이미 스타성이 아니라 “음악을 통한 탈출”에 더 가까웠다.




그의 초기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는 베트 미들러와의 만남이다. 배리 매닐로는 20대에 베트 미들러의 음악감독이 되었고, 그녀가 뉴욕의 콘티넨털 배스에서 이른바 ‘배스하우스 베티’로 공연하던 시절을 함께했다. 이 공간은 게이 남성과 그 동맹을 위한 배스하우스였고, 당시 뉴욕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매우 독특한 현장이었다. 매닐로는 이에 대해 특별히 놀라거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말하며, 자연스럽게 그 공간을 받아들였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와 미들러에게 각각 출발점이 되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비틀스에게 카번 클럽이 그랬던 것처럼 두 사람의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다. 미들러는 이곳에서 1940년대 곡과 대담한 농담을 섞은 무대를 선보이며 팬을 모았고, 공연이 끝날 즈음에는 음반 계약까지 따낸다. 다만 콘티넨털 배스는 습기가 심해서 피아노 조율이 늘 문제였다는 일화가 남아 있는데, 이 사소한 에피소드조차 나중의 거대한 커리어를 떠올리면 꽤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위대한 팝스타의 출발이 언제나 우아하고 완벽한 장소였던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들으면 늘 놀라는 사실은, 배리 매닐로가 초기 생계를 광고 징글 쓰기로 유지했다는 점이다. 그는 텔레비전 광고 음악을 만들며 대중이 무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가장 강한 멜로디를 훈련했고, 실제로 “Band-Aid’s stuck on me”나 “Like a good neighbor, State Farm is there” 같은 문구를 남겼다. 특히 스테이트 팜 징글은 그가 단 500달러를 받고 넘긴 곡이지만, 이후 수십 년 동안 엄청난 방송 빈도로 울려 퍼지며 사실상 그의 가장 많이 재생된 음악이 되었다. 이 대목이 흥미로운 이유는, 배리 매닐로라는 이름이 나중에는 감상적이고 극적인 발라드의 상징처럼 보였어도, 정작 그 감각의 바탕에는 몇 초 안에 절대 잊히지 않는 후렴을 만드는 광고 음악의 훈련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역사로 받아들인다. 어쩌면 바로 이 점이 그를 더 흥미롭게 만든다. 대중성과 예술성, 상업성과 진정성 사이를 깔끔하게 나누기보다, 가장 상업적인 공간에서 배운 기술을 훗날 자기 고유한 팝 음악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을 생각하면 “I Write the Songs”의 아이러니는 더 선명해진다. 많은 사람은 제목만 보고 당연히 배리 매닐로가 쓴 곡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 곡은 그의 대표곡처럼 남아 있다. 하지만 이 노래는 브루스 존스턴이 쓴 곡이다. 다시 말해, 세상 사람들은 “나는 노래를 쓴다”고 노래하는 가수를 보며 그가 자신의 커리어 전체를 자전적으로 요약한다고 믿었지만, 정작 그 곡은 그의 작품이 아니었다. 여기서 배리 매닐로가 보여 주는 태도는 꽤 흥미롭다. 그는 이 사실에 집착하거나 억울해하기보다, 오히려 사람들이 그 노래를 통해 기쁨을 얻었다면 괜찮다고 말한다. 사실 그는 원래부터 브릴 빌딩 전통의 송라이터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었고, 다른 가수를 위해 곡을 쓰는 삶을 더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무대 위 주인공이 되기보다, 뒤에서 히트곡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I Write the Songs”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그가 그 곡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정작 그는 정말로 평생 노래를 쓰며 살고 싶었던 사람이라는 점에 있다. 제목과 현실은 비껴가지만, 깊은 층위에서는 오히려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무대 공포 역시 배리 매닐로를 이해하는 데 빼놓기 어렵다. 대중은 성공한 스타라면 스포트라이트를 당연히 즐겼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자신이 무대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을 만큼 겁을 먹었다고 말해 왔다. 애초에 공연자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무대에 서는 기술은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배워야 했던 기술이었다. 그는 지금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밴드 뒤에서 연주하거나 작곡과 편곡을 하는 역할에 더 편안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 대목은 배리 매닐로라는 인물이 왜 오랜 세월 신비롭게 느껴졌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는 엄청난 인지도를 가진 스타였지만, 본질적으로는 “유명해지고 싶었던 사람”보다 “음악을 만들고 싶었던 사람”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은 늘 그를 보며 익숙함을 느끼는 동시에, 왜인지 완전히 다 파악했다고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도 스타라는 역할을 끝까지 완전히 자기 것으로 여기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생활에서는 오랫동안 더욱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하이스쿨 시절 연인이던 수전 덱스터와 결혼했지만, 이 결혼은 1년 만에 무효가 되었다. 이후 여성들과의 교제설과 장기 관계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1978년 무렵부터 자신의 매니저 개리 키프와 오랜 관계를 이어 왔다. 두 사람은 2014년에 비공개로 결혼했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배리 매닐로는 사실상 늦은 커밍아웃을 하게 된다.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유명인의 성적 정체성이 밝혀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오랫동안 팬들이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실망할 것이라 두려워했고,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막상 사실이 알려지자 팬들은 예상보다 훨씬 따뜻하고 기쁜 반응을 보였다. 이 장면은 스타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오래 대중의 환상을 관리해 왔는지를 보여 주면서도, 동시에 대중이 반드시 그가 두려워한 만큼 가혹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도 드러낸다. 배리 매닐로의 커밍아웃은 극적인 스캔들이 아니라, 아주 긴 시간 끝에 겨우 도착한 안도와 확인의 순간처럼 읽힌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조심스러운 사람이면서도, 동시에 업계의 거물들로부터는 아주 강한 인정을 받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프랭크 시나트라다. 시나트라는 한때 영국 언론 앞에서 배리 매닐로를 두고 “그가 다음이다”라고 말했고, 이는 매닐로에게 엄청난 의미를 가졌다. 당시 그는 평론가들에게 심하게 두들겨 맞고 있었고, 대중적 성공과 비평적 경멸 사이에서 흔들리던 시기였다. 그런 순간에 시나트라 같은 거대한 존재가 자신을 공개적으로 추켜세운 것은, 단순한 칭찬을 넘어 거의 계보의 인정을 받는 일에 가까웠다. 배리 매닐로는 나중에 이를 떠올리며 정말 꼭 필요했던 시기에 그런 말을 들었다고 회상한다. 이 일화는 그의 커리어를 관통하는 또 다른 긴장을 보여 준다. 대중은 그를 사랑했지만 평단은 종종 얕보고, 동료 거물들은 오히려 더 정확하게 그의 능력을 알아봤다는 점이다. 배리 매닐로의 “신비로움”은 이런 모순에서도 나온다. 너무 대중적이라 가볍게 취급되지만, 정작 음악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쉽게 보지 않았던 것이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Harmony에 대한 집념도 이 사람을 이해하는 열쇠다. 배리 매닐로는 오래전부터 팝스타가 되기보다 원래 하고 싶었던 작업으로서 뮤지컬을 품고 있었고, Harmony는 바로 그 욕망의 상징 같은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1920년대 독일 남성 보컬 그룹 코미디언 하모니스츠의 실화를 다루며, 그들의 성공과 히틀러의 부상이 겹쳐지는 비극적 시대를 무대로 한다. 1997년 라호야 플레이하우스 초연 이후 2003년 필라델피아 프리브로드웨이 트라이아웃이 자금난으로 무너지고, 이후 다시 애틀랜타와 뉴욕 박물관 무대를 거쳐 2023년에야 브로드웨이 정식 개막에 이른 긴 여정을 보면, 이 프로젝트가 단순한 부업이 아니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결국 브로드웨이에서는 오래 버티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원 캐스트 앨범을 남겼다는 사실까지 포함하면 이 작품은 상업적 성공보다 집념 자체가 더 중요한 경우에 가깝다. 팝스타 배리 매닐로의 화려한 이미지 뒤에, 수십 년 동안 한 이야기를 놓지 않고 밀어붙이는 작곡가적 집요함이 숨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의 커리어에는 이런 “대중이 아는 배리 매닐로”와 “그가 실제로 사랑한 음악” 사이의 긴장이 계속 반복된다. 그는 American Bandstand의 주제가 “Bandstand Boogie”를 1970년대 후반에 다시 부활시키는 데 관여했고, 여기에 새 가사를 붙여 무려 10년 동안 프로그램의 얼굴 같은 노래를 만들었다. 또 “Copacabana”는 처음에는 너무 우스꽝스럽고 라디오에서 틀기 어려운 곡이라고 여겼지만, 결국 자신의 가장 상징적인 히트곡이 되었다. 이 곡을 부를 때 입었던 과장된 은색 셔츠와 리키 리카도풍 럼바 셔츠, 그리고 그 의상을 스미스소니언에 보내려다 농담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돌려받았다는 일화는 매닐로가 은근히 자기 커리어의 과장성과 캠프적 면모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보여 준다. 그는 늘 지나치게 진지한 사람으로만 살지 않았다. 자기 노래가 때로 우스꽝스럽고 과장되고 화려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동시에 그것을 부끄러워하기보다 유머로 감싸 안는 법도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크리스마스 음악에 대한 그의 애정이다. 유대계 음악가인 그는 세 장의 크리스마스 앨범과 텔레비전 스페셜까지 만들었고, 이에 대해 스스로도 “유대인으로서 크리스마스 앨범을 많이 만들었다”고 웃으며 말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단순한 연말 시장 공략이 아니다. 그에게 크리스마스 음악은 종교적 정체성보다 “위대한 아메리칸 송북”의 연장선에 더 가깝다. 어빙 벌린 같은 작곡가들이 남긴 계절 노래는 그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작곡과 편곡의 전통이었고, 그는 늘 자신이 그 시대에 조금 늦게 태어났다고 느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앨범을 만들 기회가 오면, 그것은 단지 시즌 상품이 아니라 자신이 애정해 온 작곡 세계 안으로 잠시 들어갈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된다. 이 대목은 배리 매닐로라는 인물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장면 가운데 하나다. 그는 언제나 현재의 팝스타였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조금 더 오래된 미국 대중음악 전통 속의 장인이 되고 싶어 했던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배리 매닐로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미스터리와 의외성을 함께 남기는 이유는, 그가 단순히 히트곡 많은 팝스타로만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브루클린의 음악 소년에서 출발해 아코디언과 피아노를 거쳐, 광고 징글 작곡가와 편곡자, 베트 미들러의 음악감독, 그리고 마침내 무대 위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 내내 그는 무대보다 작곡을 더 자연스럽게 느꼈고, 유명세를 원해서보다 음악을 만들고 싶어서 움직인 사람에 가까웠다. 오랫동안 사생활을 숨겨야 했던 두려움, 프랭크 시나트라의 결정적 인정, 브로드웨이 뮤지컬 Harmony에 대한 집요한 애정, 그리고 크리스마스 스탠더드에 대한 사랑까지 모두 합치면, 배리 매닐로의 삶은 “대중이 본 이미지”와 “그가 실제로 사랑한 음악의 자리” 사이를 오래 오가며 만들어진 경력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는 너무 익숙한 이름이면서도, 막상 들여다보면 아직 설명되지 않은 방이 많이 남아 있는 음악가라고 할 수 있다.